제 2020호외-6 호 학생 독립운동 기념일, 학생의 힘으로 세상을 흔들다
기억 속에 잊힌 학생 독립운동 기념일
근처에 달력이 있다면, 11월 달에 적혀 있는 작은 글씨들을 확인해보자. 달력이 없다면 핸드폰 속 달력 애플리케이션도 좋다. 11월에는 어떤 기념일이 있을까? 점자의 날, 소상공인의 날, 농업인의 날, 보행자의 날, 소방의 날 등 기념일이 많지만, 거의 대부분의 달력에는 이런 기념일들이 기록되어 있지 않다. 그리고 이들과 함께 잊힌 또 하나의 기념일이 있다. 바로 11월 3일, ‘학생 독립운동 기념일’이다.
학생의 날이라고도 불리는 학생 독립운동 기념일은 정작 학생들조차 모르는 경우가 다반사이다. 달력에 기재되어 있지 않는 경우도 많고, 교과서에서도 중요하게 다루고 있지 않아 학생들의 기억에서 쉽게 잊히기 때문이다. 학생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학생의 날이라니, 안타까운 현실이다. 과연 학생 독립운동 기념일은 무엇일까?
학생 독립운동 기념일의 시작은 바로 광주 학생운동이다. 광주 학생운동은 1929년 광주 지역 학생의 주도로 시작된 항일 독립 만세 운동으로, 이내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광복 이후 한국 전쟁이 발발하며 다시금 민족적 위기를 맞이하자, 국가는 학도들에게 민족적 사명을 다하도록 사기를 드높이기 위해 광주 학생운동이 일어났던 11월 3일을 학생의 날로 지정했다. 1973년 각종 기념일을 통폐합함에 따라 학생의 날 또한 폐지되었으나, 1984년 다시 부활하였고, 2006년에는 그 이름이 학생 독립운동 기념일로 변경되었다. 학생들이 일본의 식민지 정책에 항거한 날을 기념하여 제정된 학생 독립운동 기념일은 결국 우리 청년들이 국가를 위해 해야 할 일을 상기시켜주는 날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1929년 11월 3일 광주에서는 어떤 일이 있었던 것인지, 청년들이 국가를 위해 해야 할 일이란 것은 도대체 무엇인지 알아보자.
광주 학생운동의 서막
1919년 3월 1일 만세 운동 이후, 우리 민족의 독립을 위한 움직임은 이전보다 활발해졌고 일본은 이를 막고자 문화 통치를 표방했다. 겉으로는 조선의 문화와 전통을 존중하는 듯 했으나 실상은 민족의 각성을 잠재우고 민족을 분열시키려는 의도였다. 교육제도 또한 예외는 아니었기에 일본은 조선인에게 기초 학문과 기술 교육만 실시했다. 조선인의 지적 수준이 높아지는 것을 우려해 친일 통치에 기여할 수 있는 최소한의 인력만을 길러내기 위한 정책이었다.
이러한 차별적이고 제한적인 식민지 교육 상황에 분개한 조선인 학생들은 직접 항일 운동을 전개하며 일본에 맞섰다. 광주 학생운동의 이전에도 이미 1928년에만 83건의 항일 학생 운동이 전개되었다는 사실은 조선 학생들의 식민지 교육 정책과 일제의 탄압에 저항 의식을 가지고 맞서 싸웠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준다.
이러한 항일 의식의 고조 속에서 광주고등보통학교·광주농업학교·광주사범학교·광주여자고등보통학교·목포상업학교 등의 광주학생계에서는 학생 결사를 조직하고 학생소비조합을 만들어 자금 조달을 하는 등 체계적으로 항일 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들은 일제의 탄압에 저항하며 동맹 휴교 운동을 벌이기도 했는데, 학교 내부 및 광주 지방의 차별 교육 문제에 대한 저항으로 시작한 이 동맹 휴교 운동은 식민지 교육 체제와 통치 기구에 대한 항쟁으로 성격이 확대되었다.
1929년에 들어서도 광주 학생들의 항일 의식은 조금도 위축되지 않았고, 오히려 조선인 학생들과 일본인 학생들의 갈등이 심화되었다. 한일 학생 간의 대립은 1929년 10월 30일, 나주역에서 일본인 남학생들이 우리 조선 여학생들의 댕기머리를 잡아당기며 희롱한 것을 계기로 폭발하였다. 이것을 본 조선 남학생들이 일본인 남학생과 충돌하며 경찰까지 개입하게 되었다. 이어 11월 1일에는 광주역에서 일본인 학생들이 다시금 조선인 학생에게 시비를 걸면서 한일 학생 간의 충돌 사건이 다시 일어났다. 이런 상황 속에서 고조되어 가던 광주 학생들의 대일항쟁의식은 1929년 11월 3일 대항일 학생운동으로 확대되었다. 11월 3일 광주의 학생들은 ‘조선 독립 만세’를 외치고 운동가를 고창하며 가두시위를 진행하였다. 이들은 경찰과 소방대의 탄압에 저항하며 오전과 오후 두 차례에 걸쳐 광주 시내를 행진했다. 이날 40명의 학생이 구속되었는데, 이는 학생들의 항쟁 의식을 떨어뜨리기는커녕 고취시켰다.
학생들은 공동 투쟁을 촉구하는 격문을 광주 시내에 뿌렸고, 이 과정에서 많은 학생들이 퇴학당하거나 구속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항일운동을 멈추지 않았다. 이에 신간회지부·청년단체·사회단체가 함께 광주 투쟁의 전국화에 힘썼고, 결국 광주 학생 운동은 전국적인 민족 항쟁으로 이어질 수 있었다. 목포, 함평, 나주 등으로 확산되었던 항일 운동은 이내 서울 학생들의 궐기로 이어졌고, 오래지 않아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학생운동, 세상을 흔드는 힘
광주 학생 운동은 3·1 운동 이후 최대의 민족항쟁이었다. 그만큼 광주 학생 운동은 광주와 학생들만의 문제가 아니었기에 다양한 계층의 전폭적인 지지와 동참을 이끌어낼 수 있었다. 결국 광주 학생 운동은 1930년대 전개되었던 전국 단위 민족 운동의 불씨가 되었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의를 갖는다. 또한 학생들 스스로 식민지라는 사회 현실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독립을 위한 역사적 과제를 모색했다는 점, 학생 차원에서 항일 단체를 조직하고 체계적으로 운영해나갔다는 점에서 높게 평가되고 있다.
식민지라는 어려운 시대 상황 속에서 학생들이 항일 운동을 조직적으로 계획하고 전개해나갔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수도 있지만, 반대로 생각해보면 ‘학생’에게는 다른 계층과 다른 특징을 갖는다. 바로 ‘학생’이라는 동질감과 집단성에서 비롯되는 행동력이다. 이러한 학생들의 주체적인 움직임은 광주 학생운동에서 그치지 않는다.
이러한 학생운동은 특정 정치적 격변기에 사회 모든 구성원의 요구가 정치사회 민주화로 집약되어 나타나는 상황에서, 이들의 목소리를 대표하여 시위, 농성과 같은 공식화된 정치과정으로 외부의 집합적 행위를 통해서 정치사회의 민주화라는 구성원들의 요구를 표출한 행동들의 묶음이다. 특히나 한국의 학생운동은 강한 역사성ㆍ지속성ㆍ정치성을 지니고 있다는 특징이 있다.
한국의 학생운동은 근대 이전에도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신라시대 화랑이나 조선시대 성균관 유생들이 국가에 일이 있을 때마다 조직적으로 모여 목소리를 내고 힘을 합쳐 문제 해결에 힘썼던 것을 시작으로, 근대에 이르러 학생들은 조국의 독립과 민주화의 실현을 위해 힘을 모았다. 앞서 소개한 광주 학생운동 외에도 잘 알려진 3·1 운동 또한 학생들의 역할이 결코 작지 않았다. 이렇듯 조국의 독립을 위해 전개되던 학생운동은 독립 이후에는 민주화를 촉구하는 방향으로 발전하였다. 청년문화와 민족, 민중을 중심으로 1960~1990년대에는 4월 혁명, 광주항쟁, 87항쟁 등 민주화를 요구하는 개혁적인 움직임을 보였다.
열 사람의 한 걸음
2000년대에 들어서는 신자유주의를 수용하면서 학생운동이 약화되었다. 사회주의의 몰락으로 운동 진영에서 벗어나는 학생들이 늘어났으며, 대학 사회 전반에 정치적 무기력, 무관심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더 나아가 포스트모더니즘의 등장, 신세대 논쟁, 소비문화 확산, 학생운동 내부의 균열과 안주 등의 문제와 결합하면서 학생운동이 크게 약화되었다. 가장 큰 문제점은 학생들이 더 이상 사회의 문제에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회의 문제를 인식하고 해결방안을 촉구하기는커녕 무한 스펙경쟁과 취업의 늪에 빠진 오늘날의 학생들은 ‘나’ 하나의 문제를 해결하기에도 벅차다. 이런 실정은 정치 문제에서 가장 여실히 드러난다. 최근 20대 남녀의 ‘문재인 대통령 국정 수행 지지율’을 살펴보면 20대 남성으로 갈수록 과반수가 부정적, 20대 여성으로 갈수록 과반수가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더불어민주당과 자유한국당에 대한 평가 또한 이와 비슷한 양상으로 나타났다. 남녀의 정치적 견해가 이분법적으로 극단화된 것이다. 문제는 ‘왜 이 당을 지지하는가?’를 물었을 때 자신의 생각을 논리적으로 말할 수 있는 이가 적다는 것이다. 바쁜 현대사회 속에서 학생들이 정보를 얻을 수 있는 가장 편리한 공간은 SNS나 커뮤니티 등일 수밖에 없고, 신뢰할 수 없는 정보를 바탕으로 생긴 신념은 20대 남녀를 이분법적으로 가르고, 스스로 사회 문제를 고민해 볼 기회를 빼앗아 가고 있다.
그럼에도 한국의 학생운동이 완전히 몰락했다고 보기 어렵다. 박근혜 정부의 비리를 밝혀내는 데 시발점이 되었던 이화여대 학생들의 시위, 촛불시위, 최근 대학 등록금 투쟁과 관련된 시위까지 학생들의 응집력을 확인할 수 있는 주체적인 움직임들이 계속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오늘날의 관점에서 생각해봤을 때 학생운동이라 함은 근대화 시기의 민주화 운동을 먼저 떠올리고, 어렵고 멀게만 느끼기 쉽지만 사실 학생들이 주체적으로 사회 현실에 대한 문제를 인식하고 문제 해결에 앞장서거나 촉구한다면 이 또한 학생운동이라 할 수 있다.
오늘날의 학생운동은 새로운 시대적 상황과 도전 앞에서 자체 혁신을 통한 새로운 급진화의 과제에 직면해 있다. 플라톤은 “정치를 외면한 대가는 가장 저질스러운 인간에게 지배당한다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우리가 관심을 가지고 사회 현상에 대한 요구를 촉구하지 않는다면, 무엇도 달라지지 않는다. 오히려 악화될 뿐이다. ‘왜 하필 나야? 왜 하필 학생이야?’가 아니다. 나와 우리가 살아가는 이 사회를 더 좋은 사회로 만들기 위해 ‘내가 학생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는 것이다. 한 사람의 열 걸음보다 열 사람의 한 걸음이 더욱 의미 있다는 말이 있다. 거창하지 않더라도 학생들의 힘이 모인다면 사회에 변화의 바람을 불어 일으킬 수 있다.
윤소영 기자